*Spoiler Alert*
한 인간의 상상의 한계는 그리 넓지 않아서 욕망하는 것이 자신이 아는 세상의 바깥에 있을 때 스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살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을 맞닥뜨리고 나서야 깨닫는 것이다. '아, 나는 한참 동안 이것을 원해왔구나.'
BBC 드라마 <셜록>의 영향일까. 최근 수사물의 경찰은 수사 대상인 사건과 심리적인 거리를 두는 경향을 보였다. 피해자에겐 인생을 전복시키거나 혹은 완전히 끝내버린 끔찍한 사건일지라도 수사하는 이들에겐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불과하기에 (셜록의 경우엔 애초에 감정적인 이입이 불가능하므로) 혹은 감정적인 태도는 프로페셔널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일부러 감정을 억누르며 다소 건조한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다.
그러나 <Unbelivable>에선 피해자에 대한 공감과 사건에 대한 분노가 수사의 동력이며 곧 사건 해결의 동력이다. 시리즈 마지막에서 가해자가 얘기하듯 사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단서는 가장 처음 저지른 사건인 Marie Adler 사건에 가장 많았다. 그러나 당시 담당인 Parker 형사는 증거 부족을 이유로 허위 신고를 한 것이 아니냐며 피해자를 몰아 고소하기까지 한다. 이 때문에 사건은 제대로 수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후 유사한 사건이 발생해 연쇄 강간을 의심할 때에도 수사 대상으로 포함되지 않는다.
3년 뒤 사건을 수사하는 Duvall 형사의 방식은 Parker 형사와 극명하게 대비를 이룬다. Duvall 형사는 증거가 훨씬 부족한 현장임에도 (당연히!) 피해자를 의심하지 않는다. 또 피해자에 대한 세심한 배려로 신뢰를 구축, 대화를 통해 피해자를 압박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는다. Duvall 형사가 극도로 부족한 단서에도 끈질기게 수사를 이어나가는 이유는 사건 이후 피해자의 삶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남는다는 것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때문이다. 다소 화법이 거칠고 동료와 같이 일하는 것이 서툴어 보이는 Rasmussen 형사도 피해자를 대면할 때만큼은 사려 깊고 세심한 면을 보인다. 정보를 얻기 위해 새로운 피해자를 만날 때 이미 경찰에게 진술한 내용은 모두 숙지했으니 굳이 다시 얘기할 필요가 없다고, 끔찍한 기억을 되짚을 필요가 없다고 배려한다. 반면 Marie는 사건 당일만 해도 초동수사를 하러 온 경찰에게, 검사를 위해 간 병원에서, 경찰서에서 그 어떤 배려 없이 같은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해야만 했으며 심지어 매 진술이 일치하지 않는다며 의심을 받기에 이른다. 두 형사의 공감과 배려는 쓸모없거나 비효율적이거나 프로답지 못한 자세로 치부되지 않는다. 중요한 단서를 얻기 위해 필요한 태도이며 사건을 해결하는 수사 능력이다.
<Unbelievable>에서 공감 결여는 피해자를 낳는다. Parker 형사의 무심함은 Marie에게서 세상에 대한 신뢰를 앗아갔다. 눈앞의 성과에 눈이 멀어 가해자의 하드 드라이브에 있을 수많은 증거들을 무시하는 검사 역시 분명 어딘가 존재할 무수한 피해자들을 치유할 기회를 버린 것이다. 고립된 Marie에게 살아갈 의지를 쥐어준 것은 시에서 마지못해 지급한 15만 달러가 아니라 바깥 어딘가에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선한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이 이성을 추앙한 이후로 오랜 시간 여성의 특징으로 분류되고 그래서 약함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감정과 공감이 정의를 구현하는 세계. 나는 깨닫지 못한 채로 이러한 세상을 원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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