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지 한참 지났지만 그래도 이 책에 대한 감상이 더 휘발되기 전에 글로 남겨야 마땅하다고 생각했기에 늦게나마 글로 남긴다.
워낙 핫한 데다가 친구들 여럿이 이미 읽고 추천했으며 크레마 구입과 함께 가입한 예스24 북클럽에도 있었고, 요약하자면 안 읽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일말의 실망도 하지 않았다. 딱 한 가지 단점은 너무 잘 읽히는 나머지 길어야 이틀이면 마쳐버려서 슬프다. 내용이 훌륭한 것에 더해 표지까지 예뻐서 선물용으로 제격이라 이미 친구들에게 보냈다.
한참 책을 많이 읽었던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판타지를 읽으면 읽었지 SF소설 장르는 크게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예전에 SF를 안 좋아했던 건 공상과학소설이라는 단어에 갇혔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당시 읽었던 몇 편도 그런 선입견에 일조했고. 뭐랄까, SF는 기술의 발전에 초점을 맞추고 미래 사회의 화려한 외관만 다루는 듯한 느낌? 영화 <스타트렉>에서 CG로 보여주는 우주선과 워프, 외계인 등 대략 그런 이미지 말이다. 생각해보면 독서량이 0에 수렴했던 동안 SF 장르의 다른 산물, SF영화를 볼 때도 이른바 '눈뽕'에 집중한 작품보다는 <인터스텔라> 나 <그래비티>처럼 인간의 심리에 집중한 작품을 더 좋아했다. 영화 얘기를 조금만 더 하자면, 그중 특별히 기억에 남았던 건 <컨택트 Arrival>였다. 외계인에 대한 새로운 묘사나 언어학자를 통해 SF를 끌어나가는 것처럼 기존 SF영화와 다른 요소들이 흥미로웠는데, 그래도 가장 결정적 요소는 그 영화가 외계인이 아니라 두 개체 간의 소통과 그 이후에 변화한 한 사람의 인생에 집중해서가 아닐까 싶다.
<컨택트>는 사실 내가 SF소설에 대한 편견을 버리게 된 시작인 테드 창의 소설이기도 하다. 테드 창의 소설 대부분이 과학적인 혹은 허구적인 요소들을 다루고 있는데 다만 그런 요소들은 도구에 불과할 뿐이고 언제나 인간의 선택, 삶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처음 펼쳤을 때 자꾸만 테드 창이 연상되었는데, 책을 마무리할 때쯤엔 ─작가와 내가 공유하는 것들이 더 많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김초엽 작가가 훨씬 좋아졌다.
「스펙트럼」에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장면이 아닐까 싶은데 새로운 개체로 나타난 루이를 희진이 루이로 받아들이고 노을을 바라보며 루이가 보는 세계를 상상하는 부분이 너무 좋았다. 문장을 읽어내려갈수록 동굴 입구로 보이는 노을이 눈 앞에 또렷하게 그려졌는데, 루이와 희진 사이에 일어난 교감까지 그 순간을 공유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소설 속에서는 외계 행성의 생명체와 인간의 상호작용으로 서술되었으나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다 그런 것 같다. 우리는 비슷한 언어를 쓰고 있지만 가끔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얘기하다가도 우리가 각자 세상을 얼마나 다르게 보고 있는지 느낄 때면 깜짝 놀랄 때가 많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을 나도 보고 싶어 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단편으로나마 그 사람을 엿보고 이해하려는 노력 그 자체가 사랑이겠지.
진지한 주제를 다루더라도 다른 단편들은 부드럽고 색채가 다양한 느낌이었다면 「감정의 물성」은 가라앉은 회색 같았다. 그런데 나는 어렸을 때부터 우울할수록 우울한 글을, 우울한 노래를 찾아 읽고 들었어서 그런가 묘하게 위로되는 기분이 들었다. 생각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지 못할 때가 많은데 비슷한 감정을 소설이 상세하게 설명해주니 감정을 손에 쥐고 싶어하는 작중 인물들이 이해되기도 하고. 주인공의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담긴 눈물이 아니라 단지 눈물 그 자체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는 말도 내가 겪은 감정 중 하나였다. 눈물이 나는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하는 일들이 많아서 그런가 별일이 없는 어느 날 갑자기 엉엉 울어버리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럴 땐 당황스럽더라도 내가 왜 이러나 이유를 찾지 않고 그냥 우는 게 참 도움이 되더라.
읽고 한참이 지나도 어떤 문장이 생각나서 자꾸만 다시 찾게되는 책, 주변 친구들에게 꼭 쥐어주고 싶은 책은 참 오랜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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