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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넷플릭스 파티와 연말을

by 여누 Yeonu 2020. 12. 31.

다들 그렇겠지만 팬데믹 상황이 터진 후로 친구들을 만나는 빈도수가 확 줄었다. 그래도 보고는 싶고, 그렇다고 별 일 없는데 카톡이나 하는 건 좋아하지 않아서 넷플릭스 파티(이제 이름이 바뀌어서 텔레파티)로 같이 영화를 봤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크롬 브라우저에 확장 프로그램을 통해서 보는 건데, 전에는 화질도 안 좋아지고 채팅도 원활하지 않아서 영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업그레이드가 됐나? 어제오늘 두 번 다 거슬리는 거 없이 잘 봤다. 

 

어제는 <테넷> 1차를 함께 했던 친구와 이렇게 된 김에 놀란 감독 영화를 하나 더 보자고 <메멘토>를 틀었다. 둘 다 짠 과자에 맥주나 한 잔 하고 싶었으나 둘 다 똑같은 인간이라 나가서 사 오긴 귀찮아서(...) 그냥 집에 있는 디저트와 차를 준비해서 봤다. 그런데 영화를 까고 보니 이게 차 마시면서 보기엔 좀 안 어울리는 영화였다. 첫 장면은 흡사 <테넷>의 인버전이더니 흑백과 컬러 화면이 쉴 새 없이 교차하질 않나, 혼란스럽기 그지없더라. 영화는 시간을 역행하며 흘러가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등장인물이 없다. 그런데도 관객이 지치지 않게, 이게 무슨 소린지 이해하고 싶게 만드는 건 20여 년 전에도 여전하구나 싶었다.

 

*스포일러 있음*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 치명적인 스포를 하나 밟았다. 사실 아내를 죽인 게 주인공이라는 치명적 스포를...ㅜ 그런데 이게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오히려 방해가 됐다. 주인공의 기억 속에 되풀이되는 사고 장면에서 살해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빙봉이 흑막이라고 듣고 <인사이드 아웃> 본 사람 마냥 영화를 오독하면서 보는 바람에 결국 다 보고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가 상황을 다시 짚어봐야 했다.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 제대로 이해를 할 수 있겠지만, 주인공은 아내가 죽은 후 자신의 삶에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복수를 완성했다는 걸 잊기로 작정한 것 같다. 강간범을 살해한 뒤 가슴에 새겼던 I've done it을 지우고, 경찰 기록의 일부를 누락시키고. 초반 형사와 통화하는 장면에서 새미의 이야기를 시작하며 자신은 규칙적이고 정돈된 방식으로 삶을 살지만 새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하는 대사가 있다. 아내가 사라졌음을 느끼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공허함 대신 스스로에게 목적을 부여해 뭐라도 하며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온전한 기억이 있었다면 복수가 아닌 새로운 목표를 세울 수 있었겠지만 가장 마지막 기억이 사고 난 밤인데, 매일 아침 새로운 분노가 생겼을 주인공에게 차선책은 없었겠지. 주인공과 다른 타임라인에서 상황을 보기 위해 언젠가는 꼭 다시 한번 볼 생각이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펑펑 내리는 눈을 봤다. 스노우볼 속에 있는 것처럼 함박눈이 고요히 내렸다가, 휘몰아쳤다가 그렇게 하루 종일 그치지 않고 눈이 왔다. 영화를 보기 전에도 눈이 많이 내리는 동네가 배경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오늘 <윤희에게>를 보기로 한 게 얼마나 좋던지. 그 기분은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어마어마하게 증폭되었다. 동시에 아쉬움도 들었다. 왜 영화가 개봉했을 때 못 봤을까. 작년 연말에 바쁘긴 했었지만 오늘처럼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영화관에서 봤다면 참 좋았을 텐데. 이런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서 조용히 내리는 눈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참 행복했을 텐데.

 

가끔 이렇게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나면 내가 무어라 말을 더 얹는 것조차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윤희에게>도 그렇다. 작정하고 울리려는 것도, 자 우리 사랑 너무 슬프지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담담하게 풀어나갈 뿐인데 그 어떤 말보다 가슴에 와닿는다. 까칠하던 새봄과 윤희의 관계가 변하는 것도 너무 좋았다. 아름다운 것만 찍어서 사람은 찍지 않는다는 새봄이 윤희를 찍으며 예쁘다고 웃는데 왜인지 눈물이 고였다. 중간중간 눈물도 고였다가 웃음도 삐져나오게 하고, 난 이렇게 잔잔하면서도 사람을 흔들어 놓는 영화가 너무 좋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나 <패터슨>처럼. 

 

올해 봤던 영화 중 재밌었던 영화를 꼽으라면 <테넷>을 고를텐데,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골라야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윤희에게>를 고를 것이다. 영화와 한 조각 공유할 수 있는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에 이 영화를 본 기억은 잊히지 않겠지. 게다가 혼자도 아니고 친구와 함께 보니 벅차오르는 감정을 나눌 수 있어서 더 좋았다. 한참을 함께 너무 행복하다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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